터지는 불빛 속에서 발을 내디뎠다. 태민은 손목에 닿는 묵중한 진동을 느끼며 멈칫했다. 심장이 귓바퀴를 휘감고 있는 것 같았다. 차가운 벽면은 뒤덮힌 그림자처럼 그의 등 뒤에서 무겁게 눌러오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지연을 찾았다.
그녀의 눈이 그를 향해 우려 섞인 걱정을 비추고 있었다. 하지만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 짧은 움직임에서 그동안의 여정 속에서 쌓인 신뢰가 일렁였다. 태민은 긴장을 풀며 물어왔다.
"지연, 이게 다 무슨 의미일까?"
그녀는 깊은 숨을 토해냈다. "모르겠어. 하지만 여긴 우리가 그토록 찾아다니던 답변의 자리가 될 거야."
다시 한번, 그들의 발걸음은 긴 긴장 속에서 어둠 너머로 이끌렸다. 문틈새로 스며드는 바람은 구역질을 유발할 정도로 날카로운 냄새를 품고 있었다. 그 순간, 세훈이 갑자기 멈춰 뒤돌아섰다.
"좋아, 이 순간에만큼은 적이 아닌 서로에게 솔직해지는 게 좋을 것 같군," 세훈의 목소리는 한 가지 결심을 담고 있었다.
평소라면 그 자리에서 누구보다 먼저 경계심을 내세웠겠지만, 지금은 사뭇 다르게 들렸다. 그의 태도는 짐짓 무대에 서있는 배우와 같았다. 태민은 그를 눈여겨보았다.
"왜 여기까지 와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우리가 뭘 찾아야 하는지 알고 있잖아."
세훈은 입꼬리를 전체적으로 올렸다. 외면할 수 없는 진실들이 그의 미소 속에서 씩 웃고 있었다. "그럼 들어봐, 여기 있는 모든 것이 진짜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들이라면, 네가 마주할 것들은 사실 한 번도 본 적 없던 것들이야."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갑작스럽게 지면이 크게 울리고 바닥에서 작은 돌들이 튀어 올랐다. 정신을 차려보니 오래된 돌벽이 하나둘씩 비틀리기 시작했고, 그곳에서 나오는 흐릿한 빛들이 벽면을 타고 올라왔다.
"이건..." 지연이 눈을 가늘게 떴다.
태민도 곁눈질로 확인했다. 벽면에 부조처럼 새겨진 패턴들이 일제히 움직이며, 흰 눈발처럼 허공으로 분출되고 있었다. 차원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마치 과거와 미래가 얽힌 하나의 비밀스럽고 유효한 장면에 접근하는 기분이었다.
순간 태민의 눈을 사로잡은 것이 있었다. 빛 속에 서서히 나타나는 이미지. 익숙하지만 멀리 떠난 줄 알았던 면모들이었다.
"그림이... 움직여?"
지연의 목소리에 지문이 흥건한 손을 내려놓았다. 그의 시선을 따라 벽에 나타나는 장면을 바라보았다. 그건 바로 태민 자신, 어린 시절의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놀랍도록 선명한 삽화는 그의 과거가 바로 눈앞에 재현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내가 어렸을 때... 그..."
벽면 위의 그림자는 손끝에서 떨림을 전해왔다. 그 감정의 끈들 사이에서 태민은 눈을 감고 숨을 쉬었다. 어린 시절의 자신과 마주하며, 그는 그때의 순수와 두려움, 망각의 순간들을 되새김질하고 있었다. 그의 손이 떨렸다.
세훈은 그 모든 무거움을 담아 조용히 중얼거렸다. "잊고 있던 것들은 돌아오는 법이지."
그리고 그 순간, 방의 어두운 구석에서 또 다른 무언가가 태어났다. 새로운 실루엣, 두툼한 그림자가 벽을 가르고 솟아올랐다. 그건 다른 누가 아닌, 그의 아버지였다. 태민은 얼어붙었다.
"아버지?"
그의 목소리는 체념과 갈망 사이의 경계를 울렸다. 무언가 거대한 감정의 흐름이 그의 심장을 조였다.
그림자 속 인물은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렇게 손끝이 닿자마자, 온갖 진동과 파급이 방 전체를 휘몰아쳤다. 땅이 떨리며, 공간 자체가 뒤흔들리는 듯했다.
방이 무너지려는 순간, 천장이 그의 뒤에서 솟아오르고, 무겁게 떨렸다. 마치 시간이 멈출 듯한 착각 속에서 무너져 내리는 천장은 마침내 한 프레임 동안 극장처럼 멈춰 섰다.
모든 것이 지금 바로, 여기서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순간 태민은 진실을 잡으려 손을 앞으로 뻗었지만, 그림자가 그를 집어삼키며 다시 깊은 어둠 안으로 당겼다.
"그림자 속에서 네가 찾는 답변이 있을 거야."
다시금 세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미소가 다시금 차갑게 번졌다. 마침내 진실들이 새어 나오는 시간, 풀어야 할 것들, 맞물린 소리들이 얽혀 있었다. 이 순간들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다음 화가 뭐지?!"라는 호기심을 증폭시킬 수밖에 없었다.
모든 의문이 쌓여가는 가운데, 태민은 그 미궁 속의 서막을 마주할 준비를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