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피가 그의 영혼을 태우는 감각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그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었다. 아스텔리온의 이마에 닿은 내 손끝에서 피의 인장이 붉게 타오르며, 살아있는 낙인처럼 그의 살갗을 파고들었다. 그의 온몸이 활처럼 뻣뻣하게 굳었다. 억눌린 신음이 굳게 다문 입술 새로 터져 나왔고, 관자놀이에는 핏줄이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마법 결속은 상대의 동의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법. 하지만 지금 내가 시도하는 것은 동의를 구하는 계약이 아니었다. 복종을 강요하는 주박이었다.
“릴리아, 멈춰! 그건 정식 마법 결속이 아니야! 영혼을 갉아먹는 저주라고!”
엘리안의 다급한 외침이 등 뒤에서 날아와 박혔다. 그의 목소리에는 지식인의 냉철함 대신, 눈앞의 광기를 목도한 자의 순수한 공포가 서려 있었다.
“저놈 하나 때문에 네 영혼까지 더럽힐 셈이냐! 당장 그 손 떼!”
이안이 포효하며 내게 달려들려 했지만, 그는 차마 내 몸에 손을 대지 못하고 몇 걸음 앞에서 멈춰 섰다. 그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나를 막아야 한다는 이성과, 내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는 충성심 사이에서 그의 영혼이 찢겨 나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나는 그들의 목소리를 외면했다. 내 모든 의식은 눈앞의 남자, 아스텔리온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의 자수정 빛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고통, 분노, 체념,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넘어선 이름 모를 감정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그의 영혼이 내 침입에 맞서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영혼 가장 깊은 곳, 가장 어둡고 연약한 핵을 향해 내 의지를 칼날처럼 찔러 넣었다.
‘선택해.’
목소리가 아닌, 의지가 그에게 닿았다.
‘무의미한 죽음인가, 아니면 의미 있는 복종인가.’
그의 저항이 순간 멎었다. 그의 눈동자에 휘몰아치던 폭풍이 잦아들고, 텅 빈 무(無)의 심연만이 남았다. 그는 선택한 것이다. 아니, 그는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이 선택지를 기다려 왔는지도 몰랐다. 지긋지긋한 운명의 굴레를 끊어줄, 자신보다 더 잔인하고 강력한 주인을.
아스텔리온의 입술이 아주 미세하게,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움직였다. 그가 뭐라고 속삭였는지 듣지 못했다. 하지만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영혼을 옥죄고 있던 마지막 빗장이, 스르르 풀려나가는 것을.
그 순간, 그의 이마에 새겨지던 피의 인장이 섬광처럼 터져 나왔다. 붉은 빛이 내 눈을 멀게 할 듯이 공간 전체를 뒤덮었다. 나는 비틀거리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마력의 격류가 빠져나간 몸은 껍데기처럼 허탈했다.
빛이 멎었을 때, 아스텔리온은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의 이마에는 더 이상 피의 흔적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붉은 낙인은 그의 살갗이 아닌, 영혼 가장 깊은 곳에 새겨졌다는 것을. 이제 그의 저주, 그의 힘, 그의 목숨은 온전히 나의 것이 되었다. 그는 나를 배신할 수 없다. 나를 공격할 수도 없다. 심지어 나의 허락 없이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나는 살아있는 재앙을 내 손에 넣었다. 그리고 그 대가로, 내 영혼의 일부를 영원히 그에게 저당 잡혔다.
***
차가운 침묵이 무덤 전체를 지배했다.
“괜찮은 거냐?”
가장 먼저 내게 다가온 것은 이안이었다. 그는 내 어깨를 붙잡고, 혹시 내가 어디 다치기라도 한 것처럼 내 얼굴과 팔을 살폈다. 그의 눈에는 아스텔리온을 향한 분노보다, 무모한 짓을 저지른 나를 향한 걱정이 더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문제없어.”
나는 짧게 대답하며 그의 손을 밀어냈다. 괜찮지 않았다. 영혼의 일부가 칼로 도려내진 듯 욱신거렸다. 하지만 이 나약한 모습을 그들에게 보일 수는 없었다.
그때, 바닥에 쓰러져 있던 아스텔리온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움직임에는 이전에 보았던 우아함이나 날렵함이 없었다. 그저 텅 빈 기계가 관절을 움직이는 듯한, 무기질적인 소리만이 들리는 듯했다. 그는 무릎의 먼지를 털어내는 대신, 내 앞에 와서 소리 없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명령을, 주군.”
그의 목소리는 모든 감정이 거세되어 있었다. 예전의 카엘이 내뱉던, 꿀처럼 달콤하고 칼처럼 날카롭던 그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오직 복종만을 위해 존재하는, 그림자의 목소리였다. 그의 변화는 성공의 증거였지만, 어째서인지 가슴 한구석이 서늘하게 시려왔다.
“저 개자식을…!”
이안이 다시 검을 움켜쥐었지만, 나는 손을 들어 그를 막았다.
“그는 이제 내 개야, 이안. 내 허락 없이는 물지 않아.”
내 차가운 말에 이안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그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부서진 석상처럼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나는 무릎 꿇은 아스텔리온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그의 모든 것을 빼앗았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역으로 내게서 무언가를 앗아간 것만 같았다. 마지막 남은 인간적인 감정 같은 것들을.
“일어서.”
나는 시선을 돌려, 무덤 중앙에 안치된 거대한 석관을 향했다.
“어머니의 메시지가 사실이라면, 이곳은 희망이 아닌 절망의 시작점이라고 했어. 확인해 봐야겠군. 초대 황제께서 후손들을 위해 어떤 지독한 절망을 남겨두셨는지.”
우리는 천천히 석관으로 다가갔다. 가까이서 본 석관은 그 웅장함만으로도 사람을 압도했다. 그것을 칭칭 감고 있는 수백 개의 쇠사슬에서는, 아직도 푸른 봉인의 불꽃이 희미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이 사슬… 평범한 쇠가 아닙니다.”
엘리안이 조심스럽게 사슬의 표면을 살폈다. 그의 눈이 학자의 호기심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고대 룬 문자로 이루어진, 마력 그 자체를 엮어 만든 봉인입니다. 이런 수준의 마법은… 신화 속에서나 가능한 일인 줄 알았습니다.”
“열 수 있나?”
이안의 질문에, 엘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합니다. 이건 물리적으로 파괴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닙니다. 이 봉인을 풀 수 있는 건, 이 봉인을 건 자, 혹은….”
그의 시선이 아스텔리온에게로 향했다.
“이 봉인의 대상이 된 존재의 피뿐이겠지요.”
모두의 시선이 다시 아스텔리온에게 쏠렸다. 그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허리춤에서 작은 단검을 꺼내 자신의 손바닥을 그었다. 검붉은 피가 하얀 대리석 바닥으로 뚝, 뚝 떨어졌다. ‘황혼의 눈물’의 피는 다른 이의 피와 달라 보이지 않았지만, 그 안에 담긴 죽음의 기운만은 무덤의 냉기를 더욱 차갑게 만들었다.
그가 피 묻은 손을 쇠사슬에 가져다 대는 순간, 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푸른 봉인의 불꽃이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사그라들었다. 수백 년간 석관을 옭아매던 쇠사슬들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육중한 석관의 뚜껑이, 이제는 우리의 힘만으로도 열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이안과 내가 석관의 양쪽을 잡고, 엘리안이 반대편에 섰다. 아스텔리온은 그저 뒤에서 우리가 하는 양을 지켜볼 뿐이었다.
“하나, 둘, 셋!”
우리는 온 힘을 다해 뚜껑을 밀었다. 끼이이익- 하는, 시간을 거스르는 듯한 끔찍한 마찰음과 함께, 수백 년의 먼지가 우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마침내 뚜껑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지고, 우리는 석관의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안에는 유골도, 부장품도 없었다.
대신,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스스로 빛을 발하는 거대한 검은 수정 하나가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수정의 표면에는 살아있는 혈관처럼, 금빛의 고대 문자들이 끊임없이 흘러 다니고 있었다.
“이건… 기억의 결정석?”
엘리안이 숨을 삼키며 중얼거렸다. 마법사의 영혼과 기억 전체를 담아 영원히 보존하는, 전설로만 내려오던 유물이었다.
내가 조심스럽게 수정 표면에 손을 가져다 대는 순간, 석관 전체에서 금빛의 문자열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와 허공에 거대한 파노라마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초대 황제의 목소리였다. 그의 영혼이 직접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위엄 있기보다는, 깊은 회한과 피로에 젖어 있었다.
허공에 떠오른 영상은 건국 신화와는 전혀 다른, 끔찍한 진실을 보여주었다. 영생에 미쳐 ‘밤의 가시’를 만들어낸 2대 황제가 아니었다. 모든 비극의 시작은, 위대한 영웅으로 칭송받던 초대 황제, 바로 그 자신이었다.
그는 제국을 건국하기 위해 고대의 악마, ‘공허의 그림자’와 계약을 맺었다. 그는 그 대가로 무적의 힘을 얻었지만, 계약의 대가는 그의 혈통이 대대로 살아있는 생명력을 제물로 바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밤의 가시’는 그 계약의 부작용으로 태어난 저주였고, ‘황혼의 눈물’은 그 저주를 정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또 다른 저주였다. 황실의 순수한 생명의 마력과, 은빛 늑대 가문의 죽음의 마력. 이 두 가지가 제국을 지탱하는 위태로운 두 개의 기둥이었던 것이다.
초대 황제의 마지막 경고가 무덤 전체에 울려 퍼졌다.
영상이 사라지고, 기억의 결정석은 다시 침묵에 잠겼다.
우리 사이에는 그 어떤 말도 오가지 않았다. 초대 황제가 제시한 해답은, 구원이 아니었다. 그것은 누군가의 희생을 강요하는, 가장 잔인한 형태의 저주였다.
그리고 그 저주를 짊어질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
우리는 말없이 태양의 영면실을 나섰다. 아스텔리온은 석관이 있던 자리의 바닥에서, 숨겨진 또 다른 비밀 통로를 열었다. 초대 황제가 자신의 죄를 고백한 후, 도망칠 수 있도록 만들어둔 마지막 비상구였다. 그 길은 우리가 들어왔던 ‘유령의 길’보다 훨씬 더 좁고 가팔랐다. 끝없이 아래로, 제국의 가장 깊은 밑바닥을 향해 이어져 있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이안의 얼굴은 분노와 절망으로 굳어 있었고, 엘리안은 방금 알게 된 끔찍한 진실을 머릿속에서 정리하느라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아스텔리온은 여전히 그림자처럼 조용했다.
나는 그들 중 누구의 얼굴도 보지 않았다. 그저 한 걸음, 한 걸음, 기계적으로 발을 내디딜 뿐이었다. 진정한 태양의 후예. 두 개의 심장. 스스로를 제물로. 그 단어들이 망치처럼 내 머리를 내리치고 있었다. 어머니는 나를 희망이라 불렀지만, 초대 황제는 나를 제물이라 불렀다. 대체 어느 쪽이 진실이란 말인가.
얼마나 걸었을까. 마침내 통로의 끝에서 희미한 빛과 함께, 축축하고 비릿한 공기가 흘러 들어왔다. 지하 수로의 악취와는 다른, 피와 녹이 뒤섞인 듯한 불쾌한 냄새였다.
“여긴… 황궁 지하감옥의 폐기 구역입니다.”
엘리안이 주변을 살피며 말했다. 잊힌 지 오래된 듯, 사방에는 낡은 고문 기구와 죄수들의 뼈가 먼지를 뒤집어쓴 채 널려 있었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섰다. 다행히 순찰하는 병사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안도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 소리는…?”
이안이 귀를 기울이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주 희미하게, 저 멀리서부터 무언가 거대한 기계가 움직이는 듯한 굉음과, 수많은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뒤섞여 들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땅이, 아주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우리는 서둘러 감옥의 작은 창살 틈으로 바깥을 내다보았다. 창 너머로 보이는 것은, 불타는 수도의 모습이었다.
“세상에….”
엘리안의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수도 곳곳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우리가 무덤 안에 갇혀 있던 사이, 바깥세상은 지옥으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우리를 경악시킨 것은 불길이 아니었다. 수도 중앙, 황궁의 첨탑을 휘감고 있는 거대한 검은 가시덩굴이었다. 그것은 살아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리며, 닿는 모든 건물을 부수고 사람들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밤의 가시.
황태자 아서가, 기어이 저주의 힘을 폭주시키고 만 것이다.
그때였다. 우리가 나온 비밀 통로의 입구, 어둠 속에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짝. 짝. 짝.
그 소름 끼치는 소리에, 우리는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 들고 소리가 난 쪽을 향해 돌아섰다. 어둠 속에서, 낯익은 인영 하나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황혼 교단의 검붉은 로브를 입은, 광신적인 눈빛의 대심문관이었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등 뒤로, 수십 명의 이단심문관들이 소리 없이 우리를 완벽하게 포위하고 있었다.
“훌륭하군. 정말 훌륭해, 그림자 공주.”
대심문관은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스스로 무덤에 들어가, 제국의 가장 추악한 비밀을 파헤치고, 마침내 살아있는 재앙을 개처럼 길들이다니. 내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군.”
그의 말은, 그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우리가 태양의 영면실에서 겪은 모든 일을, 마치 손바닥 들여다보듯 꿰뚫고 있었다.
“함정이 아니었다.”
내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래, 함정 따위가 아니지.”
대심문관은 내 말을 받았다. 그의 눈이 탐욕스러운 불꽃으로 번뜩였다.
“이것은 위대한 황태자 전하께서, 너희 모두를 위해 준비하신 마지막 ‘시험’이었다. 그리고 너희는 아주 훌륭하게, 그 시험을 통과했지.”
그는 팔을 벌렸다. 마치 무대의 주인공을 소개하는 연극배우처럼.
“이제 마지막 재료가 모두 모였군. 그림자를 품은 태양의 후예와, 죽음을 머금은 황혼의 눈물. 너희 둘만 있으면, 황태자 전하께서는 마침내 신이 되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