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셀의 내민 손은, 내 목을 조르는 올가미보다 더 치명적이었다. 그의 말은 꿀처럼 달콤했으나, 그 안에는 세상의 모든 독을 응축한 듯한 지독한 악의가 담겨 있었다. 복수를 완수하고, 제국의 종말을 내 손으로 선포하라. 그것은 내 심장의 가장 어두운 곳을 파고드는 악마의 속삭임이었다. 한순간, 정말로 모든 것을 불태워 버리고 싶은 충동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이 썩어빠진 제국, 나를 버린 아버지, 나를 죽이려 한 오라비들, 그리고 그들의 피가 흐르는 나 자신까지. 전부 다.
“릴리아… 저 개자식 말 듣지 마!”
사슬에 묶인 이안의 목소리가 쇳소리처럼 갈라져 내 귀에 박혔다. 그의 눈은 핏발이 선 채, 배신자를 향한 순수한 증오와 나를 향한 절박한 믿음으로 불타고 있었다.
“우리가… 우리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저딴 놈한테 전부 넘겨줄 수는 없어!”
우우우우우우웅-!
그의 외침은 등 뒤에서 울려 퍼지는 거대한 강철 문의 공명에 묻혔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핏빛 광채가 점점 더 강렬해지고 있었다. 저 너머의 존재가 곧 깨어날 터였다. 황태자 아서. 내 복수의 마지막 목표. 그리고 마르셀의 계획을 완성할 마지막 제물.
“선택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공주님.”
마르셀의 목소리가 초조하게 나를 재촉했다. 그의 이마에도 식은땀이 흘렀다. 그 역시 저 문 너머의 존재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통제할 수 없는 재앙을 불러내고, 그 재앙을 잡기 위해 또 다른 재앙을 이용하려는 어리석은 도박사일 뿐이었다.
내 시선은 마르셀의 얼굴을 지나, 그의 뒤에 선 ‘침묵의 감시자’들을 훑었다. 저 깨뜨릴 수 없는 갑옷. 그리고 그 갑옷에 무력화된, 내 옆의 검은 그림자. 모든 패가 막혀 있었다. 이성적으로는, 마르셀의 손을 잡는 것이 유일한 탈출구였다. 그의 힘을 빌려 아서의 목을 치고, 그 후에 그의 뒤통수를 노린다. 그것이 가장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하지만 나는 단 한 번도 합리적인 선택만으로 살아남은 적이 없었다. 죽음의 사막에서 살아 돌아온 것도, 최강의 용병이 된 것도, 이 지옥 같은 황궁의 심장부까지 온 것도.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길을, 내 의지 하나만으로 찢어발기며 걸어온 결과였다.
나는 고개를 돌려 내 곁에 선 ‘그것’을 보았다. 아스텔리온의 껍데기를 쓴 심연. 내 영혼의 절반을 대가로 얻은, 가장 위험한 검. 마르셀은 저것을 ‘열쇠’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는 틀렸다. 저건 열쇠가 아니다.
내 목줄을 쥔 괴물이다.
그리고 나는, 저 괴물의 목줄을 쥔 더 끔찍한 괴물이었다.
나는 마르셀을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그의 눈에 잠깐 기대감이 어리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이안의 얼굴에는 절망이, 엘리안의 얼굴에는 체념이 스쳤다.
나는 내민 그의 손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 그 손을 지나쳐, 그의 귓가에 내 입술을 가져갔다.
“너의 가장 큰 실수는,”
내 목소리는 얼음 조각이 서로 부딪히는 것처럼 차갑고 건조했다.
“내 개에게, 주인이 둘일 수 있다고 착각한 것이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는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가 놀라 나를 밀쳐내려던 순간, 내 손이 그의 허리춤에 꽂힌 화려한 장식의 단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나는 그 칼을 마르셀이 아닌, 내 자신의 심장을 향해 망설임 없이 찔러 넣었다.
***
“크윽…!”
칼날이 갈비뼈 사이를 뚫고 폐부를 찌르는 끔찍한 고통과 함께, 뜨거운 피가 내 입에서 울컥 쏟아졌다. 세상의 모든 색이 바래고, 소리가 멀어졌다.
“대장!”
“릴리아!”
엘리안과 이안의 비명이 아득하게 들려왔다. 마르셀조차 예상치 못한 내 행동에 경악하여, 피 묻은 단검을 든 내 손목을 붙잡았다. 그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여유로운 미소가 사라지고, 당혹과 분노가 뒤엉킨 표정이 드러났다.
“미쳤나! 지금 무슨 짓을…!”
나는 대답 대신, 비틀거리며 내 옆의 심연을 향해 쓰러졌다. 그의 차가운 몸이 나를 받아 안았다. 피가 쏟아져 나오는 내 상처 위로, 그의 얼음장 같은 손이 닿았다. 그는 본능적으로 내 고통을 ‘먹기’ 위해, 내 상처로 그의 힘을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였다.
‘마셔라.’
나는 목소리가 아닌, 내 영혼의 마지막 불꽃을 태워 그에게 명령했다.
‘내 고통만이 아니다. 내 피, 내 기억, 내 분노, 내 복수심. 그리고… 아이젠베르크의 황녀, 릴리아라는 내 존재 자체를 전부 마셔라!’
이것이 나의 마지막 도박이었다. 마르셀의 갑옷이 외부의 마력을 차단한다면, 그 갑옷을 입은 자의 내부에서부터 파괴하면 그만이다. 심연의 힘이 순수한 저주이기에 무력화된다면, 그 저주에 뚜렷한 ‘의지’와 ‘혈통’이라는 좌표를 새겨주면 되는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을, 가장 강력한 저주를 유도할 ‘제물’로 바쳤다.
그의 혼란스러운 의지가 내 머릿속을 울렸다.
‘아니.’
나는 피를 토하며 미소 지었다. 그것은 광기에 가까운 미소였다.
‘나는… 너를 통해 다시 태어난다.’
내 의지가 담긴 피가 그의 몸속으로 흘러 들어가는 순간,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그것은 물리적인 폭발이 아니었다. 혼돈 그 자체였던 심연의 힘이, ‘릴리아 폰 아이젠베르크’라는 강력한 구심점을 만나 하나의 형태로 응축되기 시작했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검은 그림자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더니 이내 다시 그의 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변화는 순식간에 일어났다. 빛조차 빨아들이던 칠흑 같은 그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희미한 자수정 빛이 다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더 이상 아스텔리온의 나약한 눈빛이 아니었다. 죽음의 심연과 복수자의 광기가 뒤섞인, 끔찍하고도 아름다운 보석의 빛이었다.
그의 몸을 감싸던 불길한 기운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모든 것을 얼어붙게 만드는 서늘한 위압감이 자리 잡았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은 더 이상 공허하지 않았다. 그 눈은 마르셀과, 그의 뒤에 선 ‘침묵의 감시자’들을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이… 이럴 수가… 저주는 분명 정화되었을 텐데….”
마르셀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뒷걸음질 쳤다.
“저건… 더 이상 단순한 저주가 아니야.”
엘리안이 창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의 눈에는 공포와 함께, 경외심마저 서려 있었다.
“황가의 혈통에 깃든 태고의 저주가… 주군의 의지를 매개로…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각성한 것이다.”
‘그것’은 내 몸을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았다. 나는 꺼져가는 의식 속에서, 그의 움직임을 보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그림자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걸음걸이는 한때 내가 기억하던, 검술의 대가처럼 우아하고 절도 있었다. 그는 마르셀의 병사 하나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병사는 본능적인 위협을 느끼고 창을 겨눴지만, ‘그것’은 멈추지 않았다. 그가 병사의 1미터 앞까지 다가섰을 때, 그는 손을 들어 병사의 갑옷에 가볍게 손을 댔다.
그리고 속삭였다. 인간의 목소리로. 아스텔리온의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 담긴 냉혹함은 분명 나의 것이었다.
“네 안의 피가, 내게 복종하라 명한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기적이 일어났다. 아니, 기적보다는 저주에 가까운 현상이었다.
쩍. 쩍. 콰지직!
병사가 입고 있던, 그 어떤 마법과 물리력도 통하지 않던 고대의 갑옷이, 안쪽에서부터 붉은 결정이 돋아나듯 스스로를 파괴하며 산산조각 나기 시작했다. 병사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갑옷 안의 그의 몸이, 피를 매개로 한 강력한 저주에 침식되어 순식간에 검은 재로 변해버렸다.
마르셀의 얼굴이 공포로 새하얗게 질렸다. 그의 완벽한 계획이, 그의 이해를 초월한 변수 하나로 인해 완전히 어그러지고 있었다.
“전원…! 전원 공격해! 저 괴물을 죽여라! 당장!”
그의 다급한 명령에, ‘침묵의 감시자’들이 일제히 새로운 존재를 향해 달려들었다.
나는 희미해져 가는 시야 속에서, 내 마지막 검이 춤추는 것을 보았다. 그는 더 이상 어둠을 내뿜지 않았다. 대신, 그의 손짓 하나하나에 공간이 뒤틀리고, 그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바닥이 얼어붙었다. 그는 싸우는 것이 아니었다. 절대적인 존재가, 하찮은 벌레들을 정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의 복수는, 이제 시작이었다.
***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마침내, 거대한 강철 문이 안쪽에서부터 터져 나오듯 열렸다. 문짝이 굉음과 함께 날아가 벽에 처박혔고, 그 너머에서 세상을 오염시키는 듯한 핏빛의 끔찍한 빛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동굴 전체가 그 빛에 잠식당하고, 살아있는 모든 것의 생명력을 빨아들이는 듯한 지독한 압력이 우리를 짓눌렀다.
“왔구나, 나의 사랑스러운 동생아.”
빛의 중심에서, 인간의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 뒤틀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것은 수십, 수백의 비명이 하나로 합쳐진 듯한 끔찍한 불협화음이었다.
“너의 그 고귀한 피와 영혼을 바쳐, 나의 강림을 완성할 마지막 제물이 되러 와주었구나!”
마르셀의 남은 병력과, 내 새로운 검의 싸움이 일순 멎었다. 모든 시선이 문 너머,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재앙의 근원을 향했다.
의식은 끝났다. 황태자 아서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나는 바닥에 쓰러진 채, 꺼져가는 숨을 몰아쉬며 빛의 중심을 노려보았다. 몸의 감각이 사라지고 있었다. 시야가 점멸했다. 하지만 내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타오르고 있었다.
내 앞에, 나의 의지를 계승한 새로운 존재가 우뚝 서 있었다. 그는 아서가 뿜어내는 신적인 압력에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돌아서서, 쓰러진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자수정 빛 눈동자에, 피투성이가 된 내 모습이 비쳤다.
그의 입술이 열렸다.
그리고 그는, 나의 목소리로.
하지만 나보다 더 차갑고, 나보다 더 깊은 증오를 담아, 빛의 중심을 향해 선포했다.
“오라버니.”
그의 목소리가 피와 저주로 물든 지하 공간 전체에 울려 퍼졌다.
“릴리아가, 당신의 왕관을 쓰러 돌아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