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텔리온.
어머니의 마지막 글자가 남긴 그 이름이, 얼어붙은 시간의 파편처럼 허공에 박혀 내 심장을 꿰뚫었다. 세상의 모든 소음이 한순간에 증발했다. 등 뒤에서 울부짖는 그림자 사냥개들의 아우성도, 우리를 옥죄는 돌벽의 냉기도, 거칠게 터져 나오는 동료들의 숨소리도, 그 무엇도 내게 닿지 않았다. 내 세상은 오직 한 사람, 내 앞에서 굳어버린 저 남자에게로 무한히 축소되었다.
카엘. 아니, 아스텔리온.
나는 그의 눈을 보았다. 언제나 나를 비웃고, 시험하고, 유혹하던 그 오만한 자수정 빛 눈동자. 그 안에서 무언가가 산산조각으로 깨져 내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가 겹겹이 쌓아 올렸던 유려한 가면이 가루가 되어 떨어져 나가고, 그 아래에 숨겨져 있던 맨얼굴이 드러났다. 그곳에는 어떠한 변명도, 기만도 없었다. 오직 모든 것을 포기한 자의 공허와, 삼켜도 삼켜도 끝이 없는 지독한 절망의 심연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그가 바로, 황혼의 눈물. 살아있는 재앙이었다.
정적을 깬 것은 분노의 포효였다.
“이… 이 개자식…!”
이안이었다. 그의 이성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그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울부짖으며, 짐승처럼 바닥을 박차고 아스텔리온에게 달려들었다. 상처 입은 몸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폭발적인 속도였다. 그의 손에 들린 대검이, 배신자를 향한 단죄의 철퇴처럼 어둠을 가르며 내리꽂혔다.
하지만 아스텔리온은 피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미동도 없이 서서, 죽음과도 같은 검날을 무감각하게 마주 볼 뿐이었다. 마치 이 순간을, 이 분노를, 이 칼날을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왔다는 듯이.
챙!
날카로운 금속음이 고막을 찢었다. 아스텔리온의 레이피어가 이안의 대검을 막아선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더 작고 날렵한, 내 단검이 그 둘 사이에 벼락처럼 파고들었다. 충격에 팔 전체가 저려왔지만, 나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비켜, 릴리아! 저놈은… 저놈은 우리 모두를 속였어! 우릴 사지로 끌고 들어온 거라고!”
이안의 눈이 핏발로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그는 나를 원망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를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과, 믿었던 동료(라고 생각했던 자)에 대한 지독한 배신감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알아.”
내 목소리는 얼음 조각처럼 차갑고 단단했다.
“그러니 비켜. 저놈은 네 사냥감이 아니야.”
나는 이안의 불타는 눈동자를 정면으로 마주하며,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했다.
“내 거야.”
내 선언에 이안의 어깨가 굳었다. 그는 무어라 더 말하려 했지만, 내 눈에 서린 살의를 읽고는 결국 이를 악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제 나와 아스텔리온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그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그와 함께했던 모든 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처음 만났을 때의 능청스러운 미소, 연회장에서의 아슬아슬한 춤, 내게 철사를 건네주던 그의 손길, ‘그림자 공주’라 부르며 나를 도발하던 목소리. 그 모든 것이 정교하게 짜인 거대한 거짓이었다. 그는 나를 이용해, 이 무덤의 문을 열기 위해 연극을 했던 것이다.
“왜.”
내 입에서 나온 것은 분노의 외침이 아닌, 메마른 질문이었다.
“왜 나였지?”
아스텔리온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의 시선은 내 손에 들린 어머니의 로켓, ‘달의 심장’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눈빛은 단순한 갈망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잃어버린 자신의 일부를 바라보는 듯한, 지독한 애증과 고통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이었다.
키에에엑!
우리의 대치를 방해한 것은 다시 나타난 그림자 사냥개들이었다. 그림자 기사들과의 싸움에서 밀려난 놈들이, 다시 우리에게로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대장, 일단 여길 벗어나야 합니다!”
엘리안이 외쳤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눈빛만은 냉철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있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이런 곳에서 감상적인 복수극을 벌일 시간은 없었다. 나는 아스텔리온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
“어머니의 메시지가 열쇠였어. ‘황혼의 눈물’ 앞에서 진실이 밝혀지는 것. 그것이 마지막 조건이었던 거야.”
나는 피가 흐르는 내 손으로, 아직 가면이 벗겨지지 않은 배신자의 손목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그의 살갗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손 대. 네놈의 더러운 피로, 이 문을 열어.”
내 명령에, 그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는 나를, 그리고 내가 잡고 있는 자신의 손을, 마지막으로 굳게 닫힌 돌문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순순히 내 손에 이끌려 문의 태양 문양 위로 자신의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나의 피, ‘그림자’의 피와.
그의 피, ‘황혼의 눈물’의 피가.
어머니의 유품, ‘달의 심장’ 위에서 마침내 하나로 합쳐지는 순간.
쿠구구구궁-!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수백 년간 닫혀 있던 태양의 영면실이 마침내 그 굳게 닫힌 입을 열기 시작했다. 문 너머에서 쏟아져 나온 것은 빛이 아니었다. 그것은 살아있는 모든 것의 숨을 멎게 하는, 순수한 죽음의 냉기였다.
***
태양의 영면실은 무덤이 아니었다. 그것은 거대한 감옥이었고, 동시에 신전이었다.
끝을 알 수 없는 까마득한 천장은 마치 밤하늘을 그대로 박아 넣은 듯 검었고, 바닥은 사람의 뼈를 갈아 만든 것처럼 새하얀 대리석이었다. 공간의 중앙에는 제국의 건국 신화가 조각된 거대한 석관이 안치되어 있었지만,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영광의 기록이 아니었다. 수백, 수천 개의 쇠사슬이 석관을 칭칭 감고 있었고, 그 사슬마다 꺼지지 않는 푸른 불꽃의 봉인 마법이 새겨져 있었다. 이곳은 위대한 황제가 잠든 곳이 아니라, 끔찍한 무언가를 가두어 둔 봉인의 장소였다.
문이 완전히 열리자,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안으로 몸을 던졌다. 그리고 우리가 들어가자마자, 문은 다시 굉음과 함께 닫히며 우리를 바깥세상과 완벽하게 단절시켰다. 그림자 사냥개들의 절규가 돌문 너머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다, 이내 완전히 끊겼다.
고요.
살을 에는 듯한 냉기와, 영혼을 짓누르는 절대적인 침묵만이 우리를 맞았다.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각자의 자리에 서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급박한 위협은 사라졌지만, 이제 우리 사이에는 그보다 더 위험하고 날카로운 칼날이 서 있었다.
“이제, 설명해.”
이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분노를 억지로 억누른 탓에 강철처럼 팽팽했다. 그는 대검 끝을 아스텔리온의 턱밑에 겨누었다.
“네놈의 정체가 뭐고, 진짜 목적이 뭔지. 하나도 남김없이 지껄여. 네놈의 대답이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초대 황제 폐하의 관짝 옆에 네놈 무덤을 하나 더 파주마.”
아스텔리온은 이안의 검날을 무시한 채, 텅 빈 눈으로 중앙의 석관을 응시했다. 마치 오랜 고향에 돌아온 순례자처럼.
“내 가문은 대대로 황실의 저주를 연구하고, 그 오물을 처리하는 ‘그림자’였다.”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더 이상 카엘의 것이 아니었다. 유쾌함과 경박함이 모두 거세된, 건조하고 메마른 아스텔리온의 목소리였다.
“황태자 아서의 선조, 그러니까 2대 황제는 영생에 미쳐 있었지. 그는 황혼의 교단과 손을 잡고, 고대의 금지된 마법을 이용해 죽음을 극복하려 했다. 그 과정에서 태어난 끔찍한 실패작이 바로 ‘밤의 가시’ 저주다. 그리고… 그 저주를 정화하고 제어하기 위한 ‘해독제’로 만들어진 것이 내 선조, 초대 ‘황혼의 눈물’이었고.”
그의 이야기는 우리가 알던 제국의 역사를 송두리째 뒤집는 것이었다.
“하지만 해독제는 저주보다 더 끔찍한 재앙이었지. 죽음을 정화하는 힘은, 곧 생명을 파괴하는 힘이었으니까. 내 선조는 폭주했고, 초대 황제는 자신의 모든 힘을 쏟아부어 그를 이 무덤에 함께 봉인했다. 이 석관 안에 잠든 것은 황제 혼자가 아니야. 나의 첫 번째 선조도 함께 잠들어 있지.”
그는 우리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에는 희미한 자조의 빛이 떠올랐다.
“그 후로 내 가문은 대대로 이 저주받은 피를 이어받으며, 황실의 개로 살아왔다. 저주를 제어하고, 황실의 적들을 암살하고, 더러운 비밀들을 땅속에 묻으면서. 하지만 아서가 황태자가 되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지. 그는 ‘밤의 가시’를 부활시켜 제국의 모든 귀족을 통제하고, 나아가 나를 제물로 삼아 불멸의 힘을 손에 넣으려 했다. 내 가문은 저항했지만, 결국 모두 몰살당했어. 나 혼자 살아남아서… 복수를 맹세했지.”
그의 고백에, 이안의 검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나 역시 숨을 삼켰다. 그의 삶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거대한 비극과 복수심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하지만 동정심이 들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의 복수를 위해 나를, 이안을, 이솔데를 장기 말로 이용했다.
“그래서, 네 복수가 뭔데.”
내가 차갑게 물었다.
“이곳에 잠든 선조의 힘을 해방시켜, 아서를 죽이고, 이 저주받은 제국을 내 손으로 끝장내는 것.”
“그 힘을 해방시키기 위해, 내 피와 어머니의 유품이 필요했던 거고.”
“그래.”
그는 순순히 인정했다.
“너의 어머니, 선대 황후께서는 모든 진실을 알고 계셨다. 그녀는 네가 태어날 때부터 ‘그림자’의 운명을 짊어진 것을 아시고, 언젠가 네가 이곳에 오게 될 것을 예감하셨지. 그래서 ‘달의 심장’에 자신의 의지를 담아, 오직 너와 내가 함께일 때만, 그리고 모든 진실이 밝혀졌을 때만 이 문이 열리도록 마지막 봉인을 걸어두신 거다. 아마… 내가 널 해치지 못하게 하려는 마지막 안전장치였겠지.”
그의 말은 모든 의문을 풀어주었지만, 동시에 더 큰 질문을 남겼다. 우리는 이제 어찌해야 하는가. 이 배신자를. 이 살아있는 재앙을.
***
“죽여야 해.”
이안이 결론을 내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저놈은 시한폭탄이야. 언제 우리 등 뒤에 칼을 꽂을지 몰라. 게다가 저놈의 목적이 저 괴물을 깨우는 거라면, 그건 황태자를 막는 게 아니라 더 큰 재앙을 불러오는 짓이라고. 당장 여기서 끝내야 해.”
엘리안은 침묵했다. 그의 이성적인 머릿속에서도, 이안의 결론 외에 다른 답을 찾지 못하는 듯했다.
나는 아스텔리온을 보았다. 그는 이안의 살기 어린 선고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담담하게 자신의 운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쩌면 그는 정말로 죽고 싶어 하는 건지도 몰랐다. 이 지긋지긋한 저주와 복수의 굴레를, 누군가의 손에 의해 끝내고 싶어 하는 건지도.
하지만 나는 그를 죽일 수 없었다. 아니, 죽여서는 안 됐다.
내 머릿속에서 수백 개의 경우의 수가 번개처럼 교차했다. 황태자 아서, 황혼의 교단, 밤의 가시 저주, 그리고 이솔데. 이 모든 것을 해결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법. 가장 확실한 카드. 그것은 바로 내 눈앞에 서 있는 이 남자, 아스텔리온이었다.
그는 독이다. 하지만 가장 강력한 독은, 때로 유일한 해독제가 되기도 하는 법이다.
나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이안이 나를 막아서려 했지만, 나는 손짓으로 그를 제지했다. 나는 아스텔리온의 턱밑에 겨눠진 이안의 검을 손으로 밀어내고, 그의 바로 앞에 섰다.
“너.”
내가 입을 열었다. 그의 텅 빈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죽고 싶나?”
내 질문에, 그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아니면… 복수를 완성하고 싶나?”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멱살을 잡아, 그의 얼굴을 내 눈앞까지 끌어당겼다. 지척에서 마주한 그의 눈동자 속 심연을, 나는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네 복수는 이제 네 것이 아니야. 내가 빼앗겠다.”
내 선언에, 그의 눈에 처음으로 의문이 떠올랐다.
“나는 네놈의 그 저주받은 힘이 필요해. 황태자의 목을 치고, 이 썩어빠진 제국을 내 발아래 무릎 꿇리기 위해서. 그러니 선택해, 아스텔리온.”
나는 내 손바닥에 남은 피로, 그의 이마에 고대의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주종을 맹세하고 영혼을 옭아매는, 가장 강력하고 잔인한 ‘마법 결속’의 초기 인장이었다. 그의 몸이 내 피에 반응하며 격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네 모든 것을 나에게 바쳐. 네 저주, 네 복수, 네 목숨까지. 내 검과 방패가 되어, 내 길을 열어. 그러면, 너의 복수를 끝내주지.”
내 제안은 구원이 아니었다.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지옥이었다. 자유로운 죽음 대신, 내 의지에 속박된 영원한 노예의 삶을 제안하는 것이었다.
“릴리아, 너 지금 무슨…!”
이안과 엘리안의 경악 어린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내 모든 신경은 내 손끝의 마법진과, 그 아래에서 숨 막히는 선택의 기로에 놓인 한 남자의 영혼에 집중되어 있었다.
나는 마지막 획을 그으며, 그의 귓가에 악마처럼 속삭였다.
“선택해, 아스텔리온. 나와 함께 모든 것을 불태우는 지옥으로 걸어 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여기서 내 동료의 칼에 심장이 꿰뚫려 개죽음을 당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