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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6화
용병 황녀의 귀환
제6화

사자굴 속의 여우

차가운 돌벽을 타고 흐르는 습기가 쇠비린내와 뒤섞여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양옆에 도열한 기사들의 강철 갑옷이 부딪히는 소리가 무거운 메아리가 되어 복도를 울렸다. 그들의 투구 아래 번뜩이는 시선은 살점이 아니라 뼈를 꿰뚫을 듯 집요했다. 여관에서 이곳, 황태자가 임시 거처로 삼은 영주의 성까지 끌려오는 동안, 나와 이안은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등 뒤에서, 나는 그의 꼿꼿한 어깨가 단 한 치의 미동도 없이 팽팽한 활시위처럼 긴장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지금,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 굴에 들어온 것이 아니었다. 사자의 아가리 속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어리석은 양이 된 꼴이었다.

마침내 육중한 나무 문이 우리 앞에서 열렸다. 방 안은 타오르는 벽난로의 열기로 후끈했다. 하지만 그 열기는 방 안을 채운 냉랭한 공기를 데우지 못했다. 방 한가운데, 거대한 작전 지도와 서류 더미가 어지럽게 널린 책상 뒤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빛을 등지고 서 있어 얼굴은 그림자에 가려졌지만, 그 위압적인 실루엣만으로도 나는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5년의 세월도 그의 강철 같은 기세를 깎아내지 못했다.

황태자 아서 데 카이센. 나의 첫째 오라버니. 그리고 지금은 나의 생사를 결정할 심판자.

“고개를 들라.”

지축을 울리는 듯한 낮고 권위적인 목소리.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벽난로의 붉은 불빛이 그의 얼굴을 비췄다. 기억 속보다 훨씬 더 깊어진 미간의 주름, 짧게 깎은 머리카락, 그리고 모든 감정을 거세한 듯한 차가운 회색 눈동자. 그는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해부하듯 뜯어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너무나도 날카로워, 피부가 베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이안의 등 뒤로 반쯤 몸을 숨기는 시늉을 했다. 겁에 질린 난민 영애, 아리아. 지금부터 내 이름은 그것이었다.

“네가 레오가 말한 그 여인인가.”

그의 질문은 나를 향했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못했다. 목구멍이 바싹 타들어가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이안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북부 리시안테 영지에서 온 카시안이라 합니다. 이쪽은 제 아내, 아리아입니다. 전하의 행차에 누를 끼쳤다면 너그러이 용서하여 주십시오.”

“내가 묻는 것은 네놈이 아니다.”

아서의 시선은 여전히 내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의 눈빛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심장이 발밑으로 곤두박질치는 것 같았다. 그의 옆에 미동도 없이 서 있던 레오 기사의 얼굴에 안타까움과 혼란이 뒤섞여 스쳐 지나갔다.

“이름이 무엇이냐.”

나는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짰다.

“아… 아리아… 입니다, 전하.”

목소리가 양처럼 떨려 나왔다. 완벽한 연기였다. 아니, 어쩌면 연기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저 눈빛 앞에서 온전히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자는 많지 않을 터였다.

“고향은 어디지?”

“리시안테… 영지입니다.”

“흐음. 리시안테라.”

아서는 천천히 책상을 돌아 내 앞으로 다가왔다. 강철 갑옷이 삐걱이는 소리가 심장을 옥죄었다. 그는 내 코앞에서 멈춰 섰다. 불과 나무, 그리고 피와 땀이 뒤섞인 그의 체취가 숨 막히게 끼쳐왔다.

“리시안테는 눈이 많이 오는 곳이지. 어린 시절, 그곳 영주가 황제 폐하께 눈표범 새끼 한 마리를 진상한 적이 있었다. 내 유일한 여동생은 그 녀석에게 ‘미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는 밤새 끌어안고 잤었지. 혹, 들어본 적 있는 이야기인가?”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것 같았다. 미르. 하얗고 작은 솜뭉치 같았던 나의 눈표범. 황궁의 그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 오직 우리 남매만이 아는 비밀이었다. 이것은 질문이 아니었다. 함정이었다. 덫에 걸린 짐승처럼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안다고 대답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이었다.

나는 온 힘을 다해 공포에 질린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눈에는 눈물까지 그렁거렸다.

“모… 모르겠습니다, 전하. 저는 그저 평범한 영지민일 뿐이라….”

내 대답에 아서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실망일까, 아니면 안도일까. 그의 속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는 잠시 나를 꿰뚫을 듯 바라보다가, 이내 흥미를 잃었다는 듯 몸을 돌렸다.

“레오. 네 눈이 늙었거나, 아니면 네 충심이 헛된 곳을 향하고 있구나.”

“……송구합니다, 전하.”

레오가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깊은 자책감이 묻어 있었다.

“내 여동생, 카일루스는 죽었다. 5년 전, 얼어붙은 강물 속에서. 죽은 자는 돌아오지 않아.”

아서는 다시 책상으로 돌아가 자리에 앉으며, 마치 길가의 돌멩이를 치우듯 우리에게 손짓했다.

“소란을 일으켜 미안하군. 보상은 충분히 해주겠다. 이만 물러가라. 그리고 다시는 내 눈에 띄지 마라.”

살았다. 온몸에 힘이 탁 풀리며 다리가 후들거렸다. 이안이 재빨리 내 허리를 부축했다. 그는 다시 한번 깊게 고개를 숙이고는, 나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지옥 같던 방을 벗어나기까지 이제 겨우 몇 걸음. 심장이 안도감에 제 박자를 찾아가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잠깐.”

아서의 목소리가 등 뒤에 비수처럼 날아와 박혔다. 나와 이안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

방 안의 공기가 다시 얼어붙었다. 나는 차마 뒤를 돌아볼 수 없었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아서의 시선이 낙인처럼 뜨거웠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대체 무엇이 문제인 거지?

“북부의 겨울은 혹독하지.”

아서는 혼잣말처럼 나직이 읊조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이전의 강철 같은 냉혹함 대신, 기묘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

“험한 길을 내려오느라 많이 지쳤을 테니. 그 작은 오르골이 지친 마음에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군.”

오르골.

그 단어가 내 귀에 들리는 순간, 세상의 모든 소리가 멎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버렸다. 오르골. 어젯밤, 이안이 내게 건넸던, 어머니의 유품.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지금 이 자리에서 나와 이안, 단둘 뿐이어야 했다. 그런데 어떻게 아서 오라버니가?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손끝이 차갑게 식어 감각이 사라졌다. 내 허리를 붙들고 있던 이안의 손에 아주 희미한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동요하고 있었다. 이 남자 역시 예상하지 못한 변수였다.

“……무슨 말씀이신지, 전하.”

이안이 최대한 침착하게 대답했지만, 그의 목소리 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나는 숨도 쉬지 못하고 얼어붙어 있었다.

아서는 대답 대신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방구석의 그림자 속에 서 있던 한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허름한 여행객 차림이었지만, 날카로운 눈빛과 다부진 체격은 그가 평범한 사람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 황태자의 첩보원이겠지. 남자는 아서에게 작은 주머니 하나를 건넸다. 아서는 그 주머니를 받아 책상 위에 쏟아냈다.

짤랑, 하는 소리와 함께 금화 몇 닢과 작은 양피지 조각이 굴러 나왔다.

“어젯밤, 네 남편이라는 자가 시장의 한 잡화상에게서 낡은 오르골 하나를 샀더군.”

아서의 시선이 이안에게 향했다. 그의 회색 눈동자가 섬뜩하게 빛났다.

“그리고 그 잡화상은 오늘 아침, 내 사람들에게 아주 흥미로운 정보를 팔았지. ‘발레리우스 대공가의 문장이 새겨진 백금화를 쓰는 수상한 남자’에 대한 정보와 함께, 그 남자가 사 간 물건에 대해서 말이야.”

발레리우스.

이안의 정체가 탄로 났다. 그리고 그 대가로, 내 정체 역시 함께 드러나 버렸다. 아서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리시안테 영지니, 눈표범 미르니 하는 것들은 전부 나를 시험하기 위한 연극에 불과했다. 그는 내가 그 함정에 걸려들지 않자, 마지막 카드를 꺼내 든 것이었다.

“다시 묻겠다.”

아서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육중한 몸이 일으키는 위압감이 방 전체를 짓눌렀다.

“발레리우스의 망령이, 죽은 내 여동생의 유품을 들고, 여기까지 온 이유가 무엇이지?”

그의 마지막 질문은 더 이상 의심이 아니었다. 그것은 확신에 찬, 서슬 퍼런 선고와도 같았다. 도망칠 곳은 없었다.

***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완벽하게 짜인 덫에 걸려들었다. 이제 남은 것은 순순히 정체를 밝히고 처분을 기다리는 것뿐. 내 손이 자결을 위해 품속의 단검으로 향하려는 찰나였다.

“역시 소문대로이십니다, 황태자 전하.”

내 귓가에 울린 것은 이안의 목소리였다. 절망적이리만치 차분하고, 심지어는 희미한 감탄마저 섞인 목소리.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그의 얼굴에서는 모든 긴장과 동요가 사라져 있었다. 대신, 그 자리에는 서늘하고 오만한 귀족의 미소가 걸려 있었다. 발레리우스 대공가의 후계자다운 얼굴이었다.

“제국의 방패라는 별명이 아깝지 않은 통찰력이시군요.”

그는 내 허리를 잡고 있던 손을 놓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는 모든 격식을 갖춰, 그러나 조금의 굽힘도 없이 아서에게 예를 표했다.

“이안 데 발레리우스. 전하를 뵙습니다.”

아서의 미간이 깊게 패였다.

“네놈이 감히 황궁을 기만해? 네 아비는 북부 성벽에 틀어박혀 나오지도 않더니, 아들놈은 첩자 노릇이나 하고 다녔군.”

“기만이라니요, 당치 않으십니다. 저는 그저, 당연히 돌아와야 할 분을 제자리로 모시고 있었을 뿐입니다.”

이안은 그렇게 말하며 옆으로 비켜섰다. 이제 아서의 시선 앞에는 그 어떤 가림막도 없이, 오롯이 나 혼자 서게 되었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이 상황에서 ‘아리아’를 연기하는 것은 더 이상 무의미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5년 만에 처음으로 내 진짜 눈으로 오라버니를 마주 보았다.

“오랜만이에요, 오라버니.”

내 목소리는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차갑게 가라앉은, 용병 그림자의 목소리였다.

내 목소리를 듣는 순간, 아서의 강철 같던 얼굴이 처음으로 무너져 내렸다. 그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책상을 짚었다. 그의 손아귀 힘에 단단한 참나무 책상 모서리가 으드득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카일루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내 이름은, 지난 5년간 내가 잊으려 발버둥 쳤던 과거 그 자체였다. 그는 괴로운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스친 것은 분노나 경계심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독한 죄책감이었다.

“살아… 있었구나. 정말로….”

나는 그의 반응에 차갑게 비웃었다.

“실망하셨나 보죠. 죽은 동생이 유령처럼 돌아와서.”

“닥쳐라!”

아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에 방 안의 모든 기사들이 반사적으로 칼자루에 손을 가져갔다.

“네가 지난 5년간 어디서 뭘 하고 다녔는지, 그리고 어째서 하필 제국의 배신자인 발레리우스 놈과 붙어먹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군. 넌 더 이상 내 동생 카일루스가 아니다.”

그는 나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선언했다.

“저 여자와 발레리우스의 첩자를 당장 지하 감옥에 가둬라! 제국을 혼란에 빠뜨리려는 2황자 놈의 수작이 틀림없다!”

기사들이 일제히 우리를 향해 검을 뽑아 들고 다가왔다. 이안은 미소마저 지우지 않은 채 자신의 검을 뽑아 들 준비를 했다. 하지만 나는 그를 막아섰다. 여기서 싸우는 것은 개죽음일 뿐이었다.

“잠깐.”

나는 내게 다가오는 칼날 앞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아서를 향해 말했다.

“오라버니는 언제나처럼 똑똑하지만, 하나는 틀렸어요. 난 2황자 편이 아니에요. 그리고… 오라버니의 적도 아니죠.”

“헛소리!”

“내가 왜 돌아왔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5년 전, 나를 얼어붙은 강물 속으로 밀어 넣으라 명령한 자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그리고… 어머니를 죽인 원수를 갚기 위해서.”

내 마지막 말에, 아서의 움직임이 순간 멈칫했다. 그의 회색 눈동자에 처음으로 의문이 떠올랐다.

바로 그때였다.

성 전체를 뒤흔드는 거대한 굉음과 함께, 우리가 있던 방의 벽 한쪽이 폭발하듯 무너져 내렸다.

📚 용병 황녀의 귀환
1화   죽은 자는 말이 없다 2화   과거의 이름 3화   지옥의 문 앞에서 4화   독사의 표식 5화   거짓된 이름의 무게 6화   사자굴 속의 여우 7화   제7화: 사자의 아가리, 독사의 이빨 8화   제8화: 두 개의 복수, 하나의 표식 9화   제9화: 기사의 검, 황녀의 길 10화   제10화: 독이 든 성배 11화   제11화: 거미줄 위의 붉은 보석 12화   제12화: 늑대의 여동생, 뱀의 축배 13화   제13화: 독이 든 축배, 뱀의 낙인 14화   제14화: 늑대의 눈물, 그림자의 칼날 15화   제15화: 유령의 일기장 16화   제16화: 재앙의 탄생, 혹은 거짓된 유언 17화   제17화: 재의 초대장, 늑대의 송곳니 18화   제18화: 피의 자격 증명 19화   제19화: 두 개의 태양, 하나의 그림자 20화   제20화: 은빛 공작의 유희 21화   제21화: 악마의 거래 조건 22화   제22화: 별의 요람, 심장의 무게 23화   제23화: 부서진 거울, 세 개의 실타래 24화   제24화: 태양의 무덤, 그림자의 열쇠 25화   제25화: 황혼의 사냥개 26화   제26화: 달의 심장이 속삭이는 것 27화   제27화: 거짓된 이름, 얼어붙은 심장 28화   제28화: 그림자의 낙인 29화   제29화: 악마의 거래 30화   제30화: 심연의 부름 31화   제31화: 부서진 족쇄, 깨어난 심연 32화   제32화: 괴물의 목줄 33화   제33화: 심연의 계약 34화   제34화: 왕관의 무게 35화   제35화: 왕관을 쓰는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