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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29화
용병 황녀의 귀환
제29화

제29화: 악마의 거래

“이것은 위대한 황태자 전하께서, 너희 모두를 위해 준비하신 마지막 ‘시험’이었다.”

대심문관의 목소리는 기름을 먹인 비단처럼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시체 안치실의 냉기보다 더 차갑게 내 뼛속을 파고들었다. 시험. 이 모든 피와 배신, 절망이 고작 누군가의 유희를 위한 시험대였다는 말인가. 그의 광신적인 눈이 우리를, 아니, 나와 내 옆에 선 아스텔리온을 번갈아 훑었다. 마치 잘 벼려진 한 쌍의 명검을 감정하는 감정사처럼.

“함정이 아니었군. 처음부터 우리를 이곳으로 몰아넣은 거였어.”

내 중얼거림에, 대심문관은 만족스럽다는 듯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공주께서는 역시 영민하시군. 그렇고말고. 그림자 사냥개 따위는 그저 너희를 재촉하기 위한 작은 장치였을 뿐. 우리는 너희가 태양의 영면실의 문을 열고, 제국의 원죄와 마주하며, 마침내 가장 완벽한 형태로 결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지.”

그의 시선이 내 손목과, 그 아래 그림자처럼 서 있는 아스텔리온을 향했다. 그는 우리가 맺은 마법 결속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림자를 품은 태양. 죽음을 머금은 달. 그리고 그 둘을 잇는 주종의 맹세라.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황태자 전하께서는 이 그림을 보시고 분명 기뻐하실 것이다. 불완전한 두 개의 저주가 마침내 하나의 완벽한 제물이 될 준비를 마쳤으니!”

“닥쳐, 이 미친 개자식아!”

이안이 참지 못하고 고함을 질렀다. 그의 대검이 바닥을 긁으며 불꽃을 튀겼다.

“네놈들의 더러운 실험 때문에 내 동생이, 그리고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 그런데 감히 그 주둥이로 신을 운운해?”

“어리석은 늑대로군.”

대심문관은 이안의 분노를 벌레 보듯 쳐다보았다.

“죽음은 정화의 과정일 뿐. 위대한 탄생을 위해서는 언제나 작은 희생이 따르는 법이다. 너희는 그저 새로운 시대의 주춧돌이 되는 영광을 누리는 것뿐이야. 특히 너, 릴리아 공주. 너는 전하의 신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제물이 되어, 전하의 불멸을 지탱하는 심장이 되는 역할 말이지.”

그의 말은 초대 황제가 남긴 경고와 정확히 일치했다. 아니, 그보다 더 끔찍했다. 황태자는 나를 단순히 죽이려는 것이 아니었다. 내 영혼까지 제물로 삼아, 영원히 그의 노예로 만들 셈이었다.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듯한 분노와 모멸감이 치밀어 올랐다.

“그 더러운 꿈은, 네놈의 무덤에나 가져가라.”

나는 단검을 고쳐 쥐었다. 정면 돌파는 불가능했다. 놈들의 수는 압도적이었고, 저 대심문관이라는 자에게서는 평범한 마법사와는 차원이 다른 사악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잡힐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내 시선이 아주 잠깐, 아스텔리온에게 닿았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미동도 없었지만, 나는 그가 내 명령을 기다리고 있음을 알았다. 우리의 영혼은 이제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길을 열어.’

내가 마음속으로 명령을 내리는 순간.

아스텔리온의 몸에서 폭풍처럼 검붉은 기운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그가 지닌 ‘황혼의 눈물’의 힘, 순수한 죽음의 마력이었다. 마력은 살아있는 채찍처럼 휘몰아치며 지하감옥의 천장과 벽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크헉! 이놈이…!”

대심문관이 경악하며 뒤로 물러섰다. 다른 이단심문관들은 갑작스러운 힘의 폭주에 비명을 지르며 결계를 펼쳤지만, 무너져 내리는 돌덩이와 흙더미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지금이야! 뛰어!”

내 외침과 동시에, 우리는 아스텔리온이 만들어낸 혼란의 중심을 뚫고 반대편 복도를 향해 몸을 날렸다. 등 뒤에서 대심문관의 분노에 찬 고함 소리가 들려왔지만, 먼지와 굉음에 묻혀 곧 희미해졌다.

***

우리는 미친 듯이 달렸다.

지하감옥을 벗어나자마자, 지옥의 풍경이 우리를 맞았다. 수도는 거대한 화장터가 되어 불타고 있었다. 하늘은 검은 연기로 뒤덮여 대낮인데도 밤처럼 어두웠고, 공기 중에는 살이 타는 역겨운 냄새와 비명소리가 가득했다. 황궁을 중심으로 뻗어 나온 거대한 밤의 가시는 도시 전체를 집어삼키려는 듯, 살아있는 촉수처럼 꿈틀거리며 건물을 부수고 사람들을 꿰뚫고 있었다.

“젠장, 젠장! 이게 대체…!”

이안은 눈앞의 참상에 말을 잇지 못하고, 그저 이를 갈았다.

“황태자가 수도의 모든 생명력을 제물로 삼아 저주를 증폭시키고 있습니다! 저 가시가 황궁 전체를 뒤덮기 전에, 막아야 합니다!”

엘리안이 절박하게 외쳤다. 그의 창백한 얼굴에는 절망이 깃들어 있었다.

우리는 불길과 무너지는 건물 잔해를 피해, 골목길을 따라 몸을 숨기며 나아갔다. 거리에는 미처 피하지 못한 시민들의 시신이 널려 있었고, 살아남은 자들은 공포에 질려 울부짖으며 흩어지고 있었다. 제국의 심장은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고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하지?”

숨을 고르며, 내가 물었다. 우리의 은신처는 이미 발각되었을 터였다. 수도 전체가 적의 손아귀에 들어간 지금, 안전한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상인 조합의 지하 금고가 있습니다.”

엘리안이 지도를 꺼내 들며 말했다.

“수도에서 가장 견고하고, 여러 개의 비밀 통로가 연결된 곳입니다. 전쟁이나 폭동 시에 귀족들이 재산을 숨기는 곳이라, 외부의 마력이나 물리적 충격에도 상당 시간 버틸 수 있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일단 그곳으로 가서 상황을 파악하고 다음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그것이 현재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우리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내 뒤를, 아스텔리온이 그림자처럼 소리 없이 따르고 있었다. 아까의 힘의 해방으로 그의 안색은 시체처럼 창백했지만, 그의 걸음에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그는 그저 명령을 수행하는 기계일 뿐이었다.

한참을 달려 거대한 광장을 가로지르려 할 때였다. 밤의 가시 중 하나가 방향을 틀어, 거대한 채찍처럼 우리를 향해 내리꽂혔다. 피할 공간이 없었다.

“위험해!”

이안이 나를 밀치며 자신의 몸으로 막아서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빨랐던 것은, 내 옆을 스쳐 지나간 검은 섬광이었다. 아스텔리온이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가시의 정면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검을 뽑는 대신, 자신의 맨손으로 그 거대한 죽음의 촉수를 맞받아쳤다.

콰아아아-!

두 개의 거대한 저주가 충돌하며, 주변의 대기가 찢어지는 듯한 굉음을 냈다. 아스텔리온의 손에 닿은 밤의 가시는 마치 강산을 만난 눈처럼, 검게 녹아내리며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 대가로, 아스텔리온의 팔 역시 검은 독기에 물들어 재처럼 부서져 내리기 시작했다.

“아스텔리온!”

나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고통스러운 신음 한 번 내지 않고, 오히려 남은 한 팔로 밤의 가시를 더욱 강하게 붙잡아 그 움직임을 봉쇄했다.

“가…십시오… 주군….”

그가 처음으로, 명령 없이 입을 열었다. 그의 턱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이놈은… 내 몫입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은 감상에 젖을 때가 아니었다. 나는 망설임을 떨쳐내고, 이안과 엘리안을 이끌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아스텔리온의 희미한 목소리가 바람결에 실려왔다.

“이것이… 당신의 명령이라면….”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거대한 폭발음이 광장 전체를 뒤흔들었다. 내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밤의 가시와 아스텔리온이 있던 자리는 검은 연기만을 남긴 채 텅 비어 있었다.

***

상인 조합의 지하 금고는 엘리안의 말대로였다. 두꺼운 강철 문은 밖의 지옥을 완벽하게 차단해주었고, 희미한 마력석 불빛만이 축축하고 차가운 돌벽을 비추고 있었다. 문을 닫자마자, 밖에서 들려오던 비명과 굉음이 거짓말처럼 멀어졌다. 오직 우리들의 거친 숨소리와, 바닥에 떨어지는 핏방울 소리만이 공간을 채웠다.

“그 자식… 죽은 건가?”

이안이 벽에 등을 기댄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의 어깨에는 아까 나를 밀칠 때 파편에 긁힌 상처가 선명했다.

“아니.”

내가 짧게 대답했다.

“죽지 않았어. 느낄 수 있어.”

마법 결속으로 이어진 연결이 아직 끊어지지 않았다. 희미하지만, 분명히 그의 생명이 아직 타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생명의 불꽃은 금방이라도 꺼질 듯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엘리안이 건네준 붕대로 이안의 상처를 감아주었다. 그는 내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한동안의 침묵 끝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무겁고 진지했다.

“릴리아.”

“…….”

“너, 아까 그놈을 걱정한 거냐?”

그의 질문은 비난이 아니었다. 순수한 의문이었다. 나는 붕대를 매던 손을 잠시 멈췄다.

“아니. 내 도구를 걱정한 것뿐이야. 아직 쓸모가 남았는데, 멋대로 부서지면 곤란하니까.”

내 대답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하지만 나 자신이 그 말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까 그 순간, 내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의 이름을 부른 것도, 계산된 행동이 아니었다.

이안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는 그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너는… 변하고 있어, 릴리아. 복수를 위해서라지만, 가끔은 네가 예전의 네가 아닌 것 같아서… 두렵다.”

그의 솔직한 고백이 비수가 되어 심장에 박혔다. 내가 괴물이 되어가는 것을, 가장 가까이 있는 그가 먼저 느끼고 있었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묵묵히 매듭을 지을 뿐이었다.

“일단 휴식을 취해야 합니다.”

무거운 침묵을 깬 것은 엘리안이었다.

“아스텔리온이 벌어준 시간 덕분에, 이단심문관들은 아직 우리 위치를 파악하지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오래가지는 못할 겁니다. 이곳도 영원히 안전하지는 않아요.”

그의 말이 맞았다. 우리는 지금 잠시 폭풍의 눈에 들어와 있을 뿐이었다. 나는 벽에 기대앉아 눈을 감았다. 초대 황제의 유언, 대심문관의 저주, 불타는 수도의 모습, 그리고 자신을 희생하던 아스텔리온의 마지막 눈빛. 모든 것이 머릿속에서 뒤엉켜 나를 짓눌렀다.

‘스스로를 제물로 바쳐야만 이 굴레를 끊을 수 있다.’

정말로 그 방법밖에 없는 것일까. 나는 복수를 위해 돌아왔다. 그런데 나의 마지막이 고작 누군가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는 것이란 말인가. 용납할 수 없었다. 나는 결코 그런 운명에 무릎 꿇지 않을 것이다.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반드시.’

나는 눈을 떴다. 내 안에서 새로운 결심이 불꽃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황태자를 죽이고 제국을 손에 넣는 것. 그것은 이제 복수의 끝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내 뜻대로 바꾸기 위한 시작이었다. 초대 황제가 만든 이 지긋지긋한 운명의 판 자체를 뒤엎어 버리겠다. 제물도, 구원자도 아닌, 새로운 규칙을 만드는 자가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스텔리온이 필요했다. 그의 저주받은 힘이, 이 판을 뒤엎을 가장 강력한 변수가 될 터였다.

나는 아스텔리온과 연결된 감각에 다시 집중했다. 그의 생명력은 여전히 희미했다. 하지만 그가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마법 결속을 통해 느껴지는 것은 그의 생명력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영혼 깊은 곳에 새겨진, 나조차 몰랐던 또 다른 낙인의 존재가 희미하게 느껴졌다. 그것은 내가 새긴 주박과는 전혀 다른, 훨씬 더 오래되고 사악한 형태의 족쇄였다.

“대심문관은 어떻게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지?”

내가 불현듯 입을 열었다. 내 질문에 이안과 엘리안이 나를 돌아보았다.

“첩자가 있었던 걸까요? 아니면… 그들의 정보망이 상상 이상으로….”

엘리안이 말을 흐렸다.

“아니. 그런 게 아니야.”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스텔리온의 영혼에 연결된 그 이질적인 감각의 정체를, 나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나는 허공을 향해, 오직 한 사람만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스텔리온. 대답해. 황혼의 교단은 어떻게 너를 추적하지?”

한동안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그의 의식이 거의 끊어지기 직전인 듯했다. 하지만 주군의 질문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아주 희미하게, 그의 목소리가 내 머릿속에 직접 울려 퍼졌다.

그의 대답은 내 최악의 예상을 현실로 만들었다. 그들은 그를 추적할 수 있었다. 언제나.

그리고 지금.

내가 그와 영혼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내 머릿속을 스치는 끔찍한 진실에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었다.

아스텔리온이 남긴 마지막 한 마디가, 사형선고처럼 뇌리에 박혔다.

📚 용병 황녀의 귀환
1화   죽은 자는 말이 없다 2화   과거의 이름 3화   지옥의 문 앞에서 4화   독사의 표식 5화   거짓된 이름의 무게 6화   사자굴 속의 여우 7화   제7화: 사자의 아가리, 독사의 이빨 8화   제8화: 두 개의 복수, 하나의 표식 9화   제9화: 기사의 검, 황녀의 길 10화   제10화: 독이 든 성배 11화   제11화: 거미줄 위의 붉은 보석 12화   제12화: 늑대의 여동생, 뱀의 축배 13화   제13화: 독이 든 축배, 뱀의 낙인 14화   제14화: 늑대의 눈물, 그림자의 칼날 15화   제15화: 유령의 일기장 16화   제16화: 재앙의 탄생, 혹은 거짓된 유언 17화   제17화: 재의 초대장, 늑대의 송곳니 18화   제18화: 피의 자격 증명 19화   제19화: 두 개의 태양, 하나의 그림자 20화   제20화: 은빛 공작의 유희 21화   제21화: 악마의 거래 조건 22화   제22화: 별의 요람, 심장의 무게 23화   제23화: 부서진 거울, 세 개의 실타래 24화   제24화: 태양의 무덤, 그림자의 열쇠 25화   제25화: 황혼의 사냥개 26화   제26화: 달의 심장이 속삭이는 것 27화   제27화: 거짓된 이름, 얼어붙은 심장 28화   제28화: 그림자의 낙인 29화   제29화: 악마의 거래 30화   제30화: 심연의 부름 31화   제31화: 부서진 족쇄, 깨어난 심연 32화   제32화: 괴물의 목줄 33화   제33화: 심연의 계약 34화   제34화: 왕관의 무게 35화   제35화: 왕관을 쓰는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