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유혹이 아니었다. 죽음 그 자체가 내민, 거부할 수 없는 구원의 손길이었다. 내 영혼을 갉아먹는 지독한 고통이, 저 심연의 굶주림을 채울 유일한 양식이라 속삭이고 있었다. 하나가 된다는 것. 그것은 곧 나의 소멸을 의미했다. 릴리아 폰 아이젠베르크라는 존재가, 저 이름 없는 태고의 어둠 속에 녹아 사라지는 것. 복수는커녕, 나 자신마저 잃어버리는 가장 끔찍한 결말이었다.
하지만 이대로는, 나는 서서히 죽어갈 터였다. 대심문관이 남긴 저주의 상처는 내 마력의 흐름을 뒤틀고, 생명력을 시들게 하고 있었다. 고통은 붉게 달궈진 쇠꼬챙이처럼 끊임없이 내 신경을 지져댔다. 눈앞이 흐릿해지고, 손끝의 감각이 무뎌졌다.
“릴리아, 정신 차려! 저건 카엘이 아니야! 저놈 말에 넘어가면 안 돼!”
이안의 절박한 외침이 멀리서 들려오는 메아리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그의 손이 내 어깨를 붙잡고 흔드는 감각이 희미했다.
“대장, 위험합니다. 그 존재와 더 깊이 엮이는 것은… 영혼의 소멸을 자초하는 일입니다.”
엘리안의 냉철한 목소리마저 공포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들은 보지 못하는 것이다. 내 영혼이 지금 이 순간에도 가루가 되어 흩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 고통을 멎게 할 유일한 해독제가, 내 눈앞의 이 괴물이라는 것을.
나는 비틀거리며 그들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칠흑 같은 심연이 담긴, 아스텔리온의 두 눈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의 눈에는 그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오직 거대한 공허와, 그 공허를 채우려는 원초적인 갈망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하나가 되는 건 사양하지.”
내 목소리는 쇳가루가 섞인 듯 거칠었지만, 그 안에 담긴 의지만은 강철처럼 단단했다.
“넌 내 것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내 선언에, 그것의 텅 빈 눈동자에 아주 희미한 파문이 일었다. 마치 이해할 수 없는 언어를 들은 짐승처럼.
그것의 의지가 다시 한번 내 머릿속을 울렸다. 더 직설적이고, 더 원초적인 요구였다.
“그래, 주겠다.”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나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그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이안이 내 앞을 막아서려 했지만, 나는 손짓으로 그를 막았다. 지금 이것은 나와 내 ‘도구’ 사이의 문제였다.
“내 고통을 가져가라. 내 상처를 먹어치워라. 네 굶주림을 채워주지.”
나는 내 앞에 선 그것의 뺨을 감싸 쥐었다. 인간의 피부라고는 할 수 없는, 차갑고 매끄러운 흑요석 같은 감촉이었다.
“그 대가로, 너는 나의 검이 되어 내 적들을 벨 것이다. 나의 방패가 되어 나를 지킬 것이다. 나의 그림자가 되어, 내 명령에 절대복종할 것이다. 이것은 거래가 아니다. 새로운 계약의 선언이다.”
그것이 조소하듯 내뱉었다.
“그래, 약하지. 그래서 네가 필요하다.”
나는 다른 쪽 손을 들어, 그의 목을 감싸 쥐었다. 그리고 내 남은 모든 힘을 끌어모아, 그의 고개를 끌어당겼다. 그의 얼음장 같은 입술이 내 입술에 닿았다.
그것은 키스가 아니었다. 영혼에 낙인을 새기는, 가장 잔인하고 신성한 의식이었다.
***
입술이 닿는 순간, 세상의 모든 소음이 사라졌다. 내 영혼을 찢어발기던 고통이, 급류처럼 그의 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것은 쾌감이 아니었다. 내 몸의 일부가, 내 존재의 증거였던 고통이 송두리째 뽑혀 나가는 상실감에 가까웠다. 텅 빈 상처 위로, 그의 차갑고 공허한 죽음의 기운이 스며들었다. 그것은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 아니었다. 상처 입은 내 영혼을, 자신의 일부와 같은 성질로 변질시키는 것에 가까웠다.
나는 이제 그의 고통을 느낄 수 있었다. 수백 년간 이어져 온 저주, 자신의 손으로 가족을 몰살시킨 기억, 영혼에 새겨진 족쇄의 낙인. 그 모든 절망이 파도처럼 나에게 밀려왔다. 하지만 그 감정들은 내 안에서 증폭되지 않고, 그저 차갑게 가라앉았다. 나는 그의 고통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인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입술을 떼었다.
아무런 변화도 없어 보였다. 그는 여전히 텅 빈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나는 여전히 피 묻은 넝마 차림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알았다. 우리 사이에 무언가 근본적인 것이 변했다는 것을. 이전의 주종 관계가 주인이 개에게 목줄을 채운 것이었다면, 이제는 목줄 자체가 주인의 팔과 한 몸이 되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하나의 공생 관계가 되었다.
나는 더 이상 고통을 느끼지 않았다. 대신, 몸 안에 거대한 공허가 자리 잡은 듯한 서늘한 허기만이 남았다.
“릴리아… 너….”
이안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경악과 연민이 뒤섞인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이 얼마나 끔찍할지, 짐작이 갔다. 아마 지금 내 얼굴은 산 사람의 그것이 아닐 터였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돌아서서, 이안과 엘리안을 마주했다.
“시간이 없어. 황궁으로 간다.”
내 목소리는 이전보다 더 낮고 차가워져 있었다. 감정의 편린조차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하게 마모된 조약돌 같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대장, 지금 상태로는….”
엘리안이 말을 흐렸다. 그는 우리 모두가 만신창이라는 사실을 에둘러 표현하고 있었다.
“내 상태는 최상이다.”
나는 그의 말을 잘랐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고통이 사라지자, 마력의 흐름이 오히려 이전보다 더 깨끗하고 강력하게 느껴졌다. 비록 그것이 내 본래의 생명력이 아닌, 저 심연의 힘을 빌려온 위태로운 것이라 할지라도.
“지금 황궁은 그야말로 지옥일 겁니다. 밤의 가시가 황궁 전체를 뒤덮었고, 황태자는 그 중심에서 의식을 거행하고 있을 터. 정면으로 돌파하는 것은 자살행위입니다.”
엘리안이 지도를 펼쳐 보이며 빠르게 상황을 브리핑했다. 그의 눈은 다시 냉철한 전략가의 그것으로 돌아와 있었다.
“황태자를 직접 노리는 건 하책입니다. 그의 힘의 근원인 밤의 가시, 그 심장부를 먼저 파괴해야 합니다. 저주의 힘을 약화시킨 뒤, 혼란을 틈타 아서의 목을 치는 겁니다.”
“심장부의 위치는?”
“자료에 따르면, 초대 황제가 ‘실패작’들을 폐기하던 장소… 황궁 지하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고대 카타콤, ‘망자들의 회랑’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곳은 제국의 가장 어두운 비밀이 잠들어 있는 곳이자, 가장 강력한 지맥이 흐르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곳으로 가는 길은?”
“이 하수도를 통해, 황궁의 지하 감옥을 거쳐 갈 수 있습니다. 다만… 그곳은 지금쯤 황혼 교단의 이단심문관들이나, 혹은 저주에 오염된 괴물들이 득실거리고 있겠지요.”
“상관없다.”
나는 내 뒤에 그림자처럼 서 있는 ‘그것’을 돌아보았다.
“길을 막는 것은, 전부 치워버리면 그만이니.”
***
망자들의 회랑으로 향하는 길은 엘리안의 예상보다 훨씬 더 끔찍했다. 하수도를 벗어나 황궁의 지하로 접어들자, 공기의 질부터 달라졌다.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와 살이 썩는 악취, 그리고 공간 전체를 짓누르는 사악한 마력의 압력이 우리를 맞았다. 벽과 천장 곳곳에는 밤의 가시에서 뻗어 나온 검은 덩굴들이 혈관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복도는 고요했다. 살아있는 순찰병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기괴하게 뒤틀린 시체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황궁 기사, 시녀, 내관 할 것 없이, 모두 밤의 가시에 생명력을 빨린 채 미라처럼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죽음의 순간에 느꼈을 극심한 공포가 그대로 박제되어 있었다.
“젠장… 아서 이 미친 새끼가, 자기 백성들을 제물로 바친 건가.”
이안이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그의 손은 내내 대검의 손잡이를 떠나지 않았다.
우리는 소리를 죽인 채, 어둠을 따라 나아갔다. 내 감각은 이전보다 몇 배는 더 예민해져 있었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움직이는 모든 것, 공기의 미세한 흐름, 멀리서 들려오는 희미한 신음 소리까지 손에 잡힐 듯 선명했다. 이것 또한, 저 심연과의 계약으로 얻은 새로운 힘이었다.
그때, 내 발걸음이 멈췄다.
“왜 그러십니까, 대장?”
엘리안이 긴장하며 속삭였다.
“온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복도 저편의 어둠 속에서 무언가 기어 오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하나가 아니었다. 수십, 수백 개의 마디 없는 팔다리가 바닥을 긁는 소름 끼치는 소리였다. 곧이어, 어둠 속에서 그것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세상에….”
엘리안의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그것들은 한때 인간이었던 것들이었다. 밤의 가시에 잠식되었지만 완전히 죽지 않고, 저주에 오염되어 끔찍한 괴물로 변해버린 황궁의 기사들이었다. 그들의 갑옷은 검은 덩굴과 뒤엉켜 살의 일부가 되었고, 투구 아래에서는 붉은 안광만이 번뜩이고 있었다. 그들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오직 살육과 파괴의 본능만이 남은 굶주린 망령이었다.
“내가 앞을 맡지. 뒤를 부탁한다!”
이안이 포효하며 가장 먼저 뛰쳐나갔다. 그의 대검이 허공을 가르며, 가장 앞서 달려오던 괴물의 머리통을 쪼개 버렸다. 하지만 괴물들은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머리가 잘려나간 몸뚱이가 잠시 비틀거리더니, 이내 다시 우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놈들은 죽일 수가 없어! 끝이 없어!”
엘리안이 마법으로 불의 벽을 만들어 괴물들의 접근을 막으며 외쳤다. 하지만 불길은 잠시 그들의 발을 묶을 뿐, 곧 사그라들었다.
나는 그 모든 광경을 차갑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내 옆에 선 그림자를 향해, 나지막이 명령했다.
“전부, 먹어치워.”
명령이 떨어지자, 아스텔리온이었던 것의 몸에서 검은 그림자가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그림자는 살아있는 생물처럼 복도 전체로 퍼져나가며, 달려드는 괴물들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괴물들은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그림자에 닿는 순간, 그들의 몸은 비명과 함께 먼지처럼 스러져 내렸다. 더 상위의 저주가, 하위의 저주를 포식하는 광경이었다.
순식간에, 우리를 향해 달려들던 수십의 괴물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복도에는 다시 정적만이 남았다.
“이… 이게 대체….”
이안은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믿을 수 없다는 듯, 텅 빈 복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나는 대답 대신,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망자들의 회랑이 머지않았다.
우리는 마침내 거대한 강철 문 앞에 도착했다. 문에는 초대 황제의 인장이 새겨져 있었고, 강력한 봉인 마법이 걸려 있었다. 하지만 수백 년의 세월과 밤의 가시의 오염으로 인해, 봉인의 힘은 거의 사라져 있었다.
이안이 문에 어깨를 부딪쳐 길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잠깐.”
내가 그를 막았다. 내 시선은 문이 아닌, 문 옆의 어둠이 가장 짙게 깔린 곳을 향해 있었다.
“누가 있군.”
내 말에, 이안과 엘리안이 긴장하며 검과 지팡이를 고쳐 쥐었다.
어둠 속에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짝. 짝. 짝. 느리고, 여유로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듯한 오만한 박수 소리였다.
“역시 공주님이십니다. 이 지옥 같은 곳을 뚫고 여기까지 오실 줄이야. 심지어 그 끔찍한 장난감까지 길들여서 말입니다.”
어둠 속에서, 낯익은 인영 하나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황혼 교단의 로브를 입지도, 황궁 기사의 갑옷을 입지도 않았다. 그저 평소처럼, 값비싸 보이지만 실용적인 여행자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언제나처럼, 속내를 알 수 없는 능글맞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는 우리의 동료이자, 제국 최고의 정보상이었으며, 가장 뛰어난 권모술수가였다.
“마르셀…?”
이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자네가 왜 여기에…! 다른 동료들은 어떻게 됐나?”
마르셀은 이안의 절박한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그저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그의 시선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나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릴리아 님. 아니, 이제는 곧 제국의 새로운 주인이 되실 분이니, 여제 폐하라 불러야 마땅하겠지요?”
그의 목소리는 꿀처럼 달콤했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비수처럼 날카로웠다.
“네놈, 지금 무슨….”
이안이 그에게 다가가려던 순간, 마르셀이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그리고 그의 등 뒤, 어둠 속에서 수십의 무장한 병사들이 소리 없이 나타나 우리의 퇴로를 완벽하게 차단했다. 그들은 황궁 기사도, 황혼 교단도 아니었다. 제3의 세력이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노려보았다. 배신인가. 처음부터 우리를 이용했던 것인가. 수많은 의문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지금 가장 중요한 질문은 단 하나였다.
“네 정체는 뭐지?”
내 차가운 물음에, 마르셀은 그 어느 때보다 화사하게 웃었다. 그 미소는, 내가 아는 그 어떤 적의 미소보다도 깊은 절망을 담고 있었다.
“정체라니요, 당치도 않으신 말씀. 저는 처음부터 제 소개를 올렸습니다만.”
그는 연극배우처럼 우아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저는 그저, 이기는 편에 붙는 보잘것없는 상인일 뿐입니다. 그리고 공주님, 아주 유감스럽게도… 당신의 승리는 바로 이 앞에서 끝났습니다.”